4월 22일, 성공기념관 건립 범국민운동추진과 100주년 추모행사
이날 기자간담회는 국가보훈처, 충청북도, 진천군, (사)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 보재이상설선생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5개 기관, 단체장이 자리를 함께 한다.
이날 기념관 건립 5개 기관과 단체장 성공기념관 건립을 위한 '양해각서' 체결한다.
체결식에는 송기섭 충북 진천군수, 박승영 충북도 보건복지국장, 김이중 충북남부보훈지청장, 이종찬 보재이상설선생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이석형 사)이상설선생기념사업 회장이 참석할 예정이다.
체결식후 기념관 건립 추진과정, 조성과 관련한 패널 5명이 해당 기관별로 기념관 건립에 따른 입장도 밝히게 된다.
이어서 공동기자회견 '선언문' 낭독도 있을 예정이다.
특히 (사)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석형)은 4월 22일(토), 10시부터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134-2, 산직마을 소재, 숭렬사에서 보재 이상설 선생 순국 제100주년을 기념해 성공기념관 건립 범국민운동추진과 100주년 추모행사를 개최키로 한다.
보재 이상설 선생(1870~1917)은 독립운동가로, 우리나라 근대수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부당성과 침략성을 들어 반대 상소문을 올리고 대한협동회을 조직, 전국적인 항일운동을 펼쳤다.
1906년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우고 최초의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실천했다.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정사로 파견돼 일제의 대한 침탈과 식민정책에 대한 부당성을 고발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세계 각국의 지지, 호소를 위해 노력했다. 이어서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을 돌며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1909년 연해주 봉밀산에 최초의 독립운동기지인 '韓興洞'을 건설하고, 1910년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해 '13도의군'을 편성, 최초의 망명정부의 수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한일병탄 이후 일제에 의해 러시아 관헌에 체포돼 니콜리스크로 추방됐으나, 1911년 블라디보스도크에서 勸業會를 조직, 한민학교를 넓이고, 1913년 중국 羅子溝에 독립군사학교인 大甸學校를 세우며 실제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4년 이동휘, 이동녕 선생등과 최초의 망명 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됐다. 1915년 상해에서 박은식, 신규식 선생 등과 신한혁명당을 조직, 본부장을 맡았으나 1917년 3월 2일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향년 48세로 서거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우스리스크 수분하 강가에 화장되고, 동지들을 위해 문고(文藁)도 모두 불태웠다.